[요약] 다시보는 사도행전 | 박영선 목사님

2024. 3. 15. 14:04리뷰/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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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_표적을 보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고치는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적이지요.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태어난 앉은뱅이를 일으킵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베드로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3:12-16 말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이 거부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뭔가 모순점이 느껴지지 않나요? 기적의 사건에서 느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나오는 능력과, 예수님의 죽음은 뭔가 조화가 되지 않습니다. 능력을 강조하면 부활이 약해지고, 죽음을 강조하면 능력이 약해지는 이상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앉은뱅이 사건과 앞선 죽음, 부활,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음에 대해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사람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 능력이라고 합니다. 능력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중에 어떤 사건이 떠오르나요?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이 능력에 가까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더 큰 사건이라는 것,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능력과 연결시키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논리가 아니라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교회에게 알리고,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복음의 기초를 전합니다.

사도행전의 시작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고 승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재로부터 시작합니다. 복음서까지는 예수님의 임재였다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재입니다.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하지시 않습니다. 대신 성령이 오십니다. 1장은 예수님의 부재였고, 2장은 성령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리고 3장에 기적이 등장합니다. 이 기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요엘 2장에 나온 예언의 성취이면서 동시에 성령님의 강림은 곧 세상이 끝이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끝이 있다는 것은 충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이해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무상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스스로 존재하거나 스스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주권자가 있고, 그분이 하나님이시다라는 겁니다.

세상이 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인격도 의지도 없습니다. 요엘 2장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고,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끝을 하나님의 계확과 뜻 가운데 작정하고 계시며, 그 증거가 성령임재이다.’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강림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류를 죄 가운데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창조를 위하여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것이고, 성령님이 오신 것은 종말의 최종적인 증거가 됩니다.

정상으로의 회복

3:16.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회복입니다. 정상인 사람에게 초월적인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정상이 아닌 사람을 정상으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목표로 지은 인류를 원래 목적답게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구원입니다. 우리가 자초한 멸망의 자리에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하나님의 영광의 존재로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이 기적의 진정한 초점입니다.

더 가지고 더 잘되고 더 욕심내는 것에 관한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이야기하고 나면 마지막에 반드시 따라오는 권면이 있는데 바로 회개입니다. 정상적인 자리에 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3:23-26. 우리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원래 목적에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십니다. 그 아들의 죽음이 우리 스스로 자초한 멸망과 심판에서 우리를 구합니다.

3:13-15상.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배척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그대로 감수하셔서 구원의 목적과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능력은 은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거부하고 발악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신 것이, 앉은 뱅이를 일으킨 기적입니다. 그 사람이 기대도 하지 않고, 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은 일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를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돈을 더 버는 것, 더 건강한 것,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그런 것과는 상관 없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라는 신분과 인생을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운명을 허락하십니다.

은혜로 주어진 구원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입은 우리는 세상의 성취에 대한 잣대에 묶여있지 않고 고급한 영원의 존재로 살게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죄에 대한 털어놓음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자기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자유와 특권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라볼 때 이 능력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밖에서 온 구원입니다. 내가 가치 있고, 무엇을 잘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함으로써 유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거부하고 우리가 원치 않았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능력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가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참으로 놀라워라.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니! 영생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운명을 가지게 되었다니! 하루에도 몇번씩 이게 말이 되나 생각한다면 참 성도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하시는 말씀은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마 28:18-20. ‘땅 끝까지 가라. 제자를 삼으라.’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의 전제를 가지고 하는 것인데 정복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떠밀려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신앙생활과 신앙인이 된 현실에 대하여 늘 마음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했던 예수

이사야 53:1-3. 이사야 53장의 예언에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아무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사는데 우리 스스로도 예수 믿고 사는 것에 대해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 같은 것이 믿든지 말든지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수님이 그렇게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부와 외면과 죽임이라는 방법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하잘것없음, 실패, 막막함, 한계, 묻혀 있는 것 같은 상실된 존재감, 또는 그런 자리 같은 것들로 하나님이 얼마든지 능력을 행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확인해주는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멸시했고, 조롱했고, 죽여버렸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신실하게 드러냈습니다.

 


06_권력으로 맞서지 않다

사도행전 4장과 5장은 초대교회가 받은 어떤 기적과 또 어떤 핍박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3장에서의 기적이 일어난 사건의 결과로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권력의 핍박

17절에 보면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위협했습니다.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하고 위협하겠다고 합니다. 21절에 보면 어떻게 처벌할 수 있을지 몰라 다시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5장에서는 베드로가 실제로 잡히기까지 합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권세가 세상 지도자들의 권력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교회가 알고 이해해야 하는 내용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도 이미 대적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4:24-26. 또 4:27-28은 세상 권력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모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라고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위협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승리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하나님이 승리를 이루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그의 부활, 너희가 죽인 예수님, 하나닝이 일으키신 예수님, 그의 죽음과 부활을 거듭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에 답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진심이고, 하나님의 기다리심이고, 양보하심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고 해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 세상, 궁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이기는 방식이 믿음입니다.

마 16:15-19.

굉장한 약속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위에 교회가 서있습니다. 아무 권세도 없는 이 고백 위에 권세를 주십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천국 열쇠도 주십니다. 우리가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우리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권력으로의 유혹

어느 교회나 이 권력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을 통해 이기는 것보다 힘으로 이기는 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어떤 잘못을 하면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잘못을 한 건 맞아도, 잘못을 안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행하는 것은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겁을 내는 것도 시험에 빠지는 일입니다. 교회의 책임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감수해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행 4:32-35. 초대교회에는 재물에 대해 이기적이지도 않고 욕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재산 다 팔아서 나눠가지가 하는 말이 나오지만 이 말씀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전에 광야에서 시험 받은 것 중 하나가 눅 4:5-8 말씀의 ‘내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 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인류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게 하겠다’하는 논쟁이 이어집니다.

헌금은 예배행위

5장으로 넘어가면서 심한 핍박으로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그 사건의 의미와 가장 중요한 본질을 증언합니다.

행 5:1-3

헌금 중에 얼마를 감추었다고,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다고 하는 걸까요? 어떤 의미의 헌금이었을까요? 헌금을 하는 태도가 가진 것 중 일부를 교회에 기부하는 것처럼, 그래서 마치 선행을 베풀 듯이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더 큰 권력의 일부를 떼어서 교회를 돕듯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기명 헌금은 옳은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이게 선행이고 잘난 행위이기 때문에 이름을 감추어 나는 잘난 척 하지 않는다는게 들어갑니다. 이름을 적어서 나 OOO이 우리 모든 권세와 궁극적인 권위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시인합니다 하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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